payback 1
개과천선. 좋은 말이다. 말대로 과거의 허물을 벗고 착해진다는 건 좋은 일이겠지. 하지만, 애초에 개과천선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제일 좋을 거다. 불행히도 난 제일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흔히 말하는 망나니로 정말 개 같은 놈이었기 때문에. 중학교 때부터 온갖 나쁜 짓을 하며 정학을 밥 먹듯이 하고, 간신히 들어간 고등학교에선 1년도 다니지 못해 퇴학을 당했다. 남편 없이 나와 동생을 기르던 어머니는 내가 퇴학을 당했을 때 오히려 자포자기한 얼굴로 혼내는 걸 그만두셨다. 지치셨던 거겠지. 새벽부터 나가 식당일을 하며 목에 풀칠하기도 바쁜 현실에 아들 하나는 그냥 포기해 버리자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고.
학교를 다니지 않게 된 나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내 세상이다 싶어 뭐든 하고 다녔다. 같은 나이 또래의 교복 입은 놈들에게 삥을 뜯고, 취객의 돈을 훔쳐 흥청망청 매일 술을 퍼마셨다. 간섭할 사람이 없는 자유로움에 하루에 두, 세 갑씩 담배도 펴댔고, 나중에 가선 뿅가는 거라며 누가 준 걸 시작으로 마약에까지 손을 댔다. 허세를 부리려고 문신을 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나 같은 놈들과 어울려 다니며 싸움질을 해댔다. 그나마 잘할 줄 아는 게 싸움이어서 그런지 무리 중에 나름 우두머리로 애들을 끌고 한밤중에 위험천만한 오토바이 곡예를 즐겼다. 그땐 그게 멋있는 줄 알았다. 내가 대단한 놈인 줄 알았다. 모두 날 두려워하고, 돼지처럼 학교에 잡혀 공부만 하는 녀석들은 나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으니까. 그 모든 것들이 점점 머리를 마비시키고 올라오지 못할 나락으로 떨어트린다는 걸 몰랐다. 가끔 개과천선을 했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어느 날 문득 자신의 모습에 회의를 느끼고 정신을 차렸다는 경우가 있다. 나도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느 순간 거울을 보고 샛노란 머리의 겉멋만 든 양아치 녀석에 놀라 정신을 차렸으면 나았을 텐데. 과거에 대한 후회는 아무리 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떠올리면 그 죄책감이 가슴을 짓누른다. 남들은 수능 준비로 정신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난 취직이라며 한 대부업소에서 일하게 되었다. 내가 하는 건 돈을 받아오는 일. 돈을 갚지 못하는 대부분은 가난 때문에 도망칠 곳도 없어 겨우 숨만 쉬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내 눈엔 그저 내 수당을 채워줄 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행패를 부리고, 아이와 여자를 두고 협박을 하고, 한밤중 기다렸다가 칼로 찌르기도 하고. 돈을 받아낼 수만 있다면 뭐든지 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생각보다 컸고, 난 여전히 자만심에 빠져있었다. 거봐, 돈도 쉽게 벌 수 있잖아. 세상은 여전히 날 두려워하고 내가 못할 건 없어 보였다. 십몇 년을 식당에서 일해도 지하 단칸 월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엄마가 한심하고 짜증 났다. 그래서 번 돈을 집에 가져다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유흥비로 쓰기에 바빴으니까. 매일 비싼 양주를 마시고, 고급 바와 술집을 돌아다니며 내가 대단하다는 걸 만끽했다. 유일하게 번 돈을 주었던 건 내 애인이었던 명신이 녀석. 나처럼 고등학교 중퇴인 그는 여자라고 해도 믿을 만큼 예쁘장한 외모의 남자였다. 내가 남자와도 잘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해준 명신이는 말 수가 별로 없고, 강아지처럼 내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게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임신을 할 걱정도 없고, 필요하면 언제든 욕구를 풀 상대. 처음 시작은 그것이었으나 1년 이상 녀석과 만나며 어느새 내 여자라는 생각마저 하게 되었다. 물론 그게 나만의 착각이었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아니, 그 당시의 인생 자체가 모두 내겐 착각이었으니 딱히 그 녀석만 집어 말한 건 없을 거다. 눈에 띄는 외모 덕분일까, 연예인이 되고 싶어하던 그는 내가 주는 돈으로 부지런히 학원에 다니고, 연예 기획사를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얌전한 성격의 그가 과연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매번 사기 기획사에 속아 돈만 날리며 우울해하는 그를 위로하는 게 일상이었으니까. 그러다 1년이 지나고 다시 해가 넘어가 초여름이 되었다. 내 나이 또래의 녀석들이 대학에 들어가 막 2년째 대학 생활을 즐길 무렵 난 여전히 사람들을 협박해 돈을 벌고 있었다. 그날은 이상하게 아침부터 일진이 좋지 않았다. 항상 기획사에 속아 울기만 하던 애인 녀석이 며칠 전 다녀온 기획사는 진짜배기라며 들떠 있었다. 그래 봤자 또 돈이나 뜯기겠지. 싶은 생각에도 그의 흥분한 얼굴이 묘하게 기분을 상하게 했다. 새벽까지 술을 퍼마신 탓에 느지막이 일어나 대부업체 사무실로 가려고 집을 나왔는데 누군가 근처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형.”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한 달 전 집에 갔을 때 봤던 동생이 몸에 맞지 않은 중학교 교복을 입고 서 있었다. “뭐야?” 학교에 있을 시간에 왜 여기 있어? 눈을 찡그리며 다가가자 삐쩍 마른 녀석이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엄마가 아파.” “그래서?” “...” “나보고 어쩌라고?” “... 돈. 엄마 병원비 좀 줘.” 저 말을 하는 게 굉장히 싫었는지 동생의 입매는 일그러진 채 다물어졌다. 난 짜증을 숨기지 않으며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안에 만 원짜리를 확인했다. “얼마나?” “얼마나 줄 수 있는데?” 난 지갑에 있던 만 원짜리를 전부 꺼내려다 손을 멈췄다. 그리고 제일 처음 물어야 했던 질문을 던졌다. “어디가 아픈데?” “... 몰라. 갑자기 쓰러졌는데 무슨 수술 받아야 한데.” 귀찮게 시리.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한 덕분에 언제나 잔병을 달고 살던 엄마를 떠올리며 만 원짜리와 함께 옆에 있던 수표를 꺼냈다. “자.” 내민 돈을 느리게 받아든 동생이 손에서 돈을 세보곤 다시 무뚝뚝하게 물었다. “더 줄 수 있어?” “병원비가 얼마나 나왔는데?” “420만 원.” “... 뭐?” 도대체 어디가 얼마나 아프기에…. 뒤이어 물어보려던 말은 동생의 눈을 보고 나오지 못했다. 언제 이렇게 커버린 지 알 수 없는 녀석은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돈을 빌리는 사람 같았다. 더는 관여하지 말라는 듯이. “줄 수 있어? 나중에 갚을게.” 네가 무슨 수로 그걸 갚아? 튀어나오려던 말을 간신히 삼키고 시계를 보았다. “이따 오후에 다시 들러. 오늘 수금하러 가니까 다는 아니더라도 반 정도는 줄 수 있어.” 그러자 끄덕. 고갯짓을 한 번 한 동생이 그대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사라지는 동생의 모습을 보며 녀석이 이 자리에서 몇 시간을 기다렸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하기 싫은 부탁을 하려고. 이날 좋지 않았던 기분은 수금을 하면서도 이어졌다. 오늘 받아내야 할 사람은 포장마차를 하는 어느 부부였다. 40대 초반인 부부의 나이에 비해 아이는 이제 세 살 정도. 그런데 그 아이의 다리에 뭔가 문제가 생겨 수술비로 돈을 빌렸었다. 뒤늦게 얻은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라 애지중지하지만, 그 자식 때문에 이 부부는 한 달에 버는 돈 전부를 빚 갚는데 써야 했다. 그러나 사람은 목에 풀칠을 하며 살아야 하고, 결국 석 달치 이자를 벌써 못 내는 형편이 되었던 것. 내가 이 부부를 찾아간 건 이번에 네 번째였다. 그동안 동전 하나 남기지 않고 매번 긁어왔지만, 오늘은 그 정도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왜냐면 나도 돈이 필요했으니까. 그래서 자주 쓰지 않는 수를 써버렸다. “헉!! 왜, 왜 이러세요?!” 울면서 주저앉은 부인 옆에서 남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를 쳤다. “뭐, 뭐 하는 겁니까?! 어서 그, 그거 치워요!” 부인처럼 그도 쓰러질 것으로 보였는데 남자라서 그런지 용케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난 오히려 더 보란 듯이 우는 아이의 몸을 잡아 끌어당겼다. 아이를 잡지 않은 내 반대편 손엔 시퍼런 칼날의 단도가 들려 있었다. “으아앙~ 으아아앙~!!” 시끄럽게 울어대며 발버둥치는 아이의 작은 몸을 붉은기가 남도록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 몸 위로 칼을 더 가져다 대자 기어이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제발, 제발 아이는 놔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아이는 놔주세요. 뭐든 드릴게요. 뭐든지...” 흐느끼는 목소리에 난 피식 웃으며 한 가지를 요구했다. “이 집 월세 계약서 가지고 와.” 그러자 남자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 그럼 저희는 어디서 살라고...” “으아아앙!!” 칼의 옆면으로 아이의 부드러운 살을 툭 쳤다. 칼의 차가움 때문인지 놀란 아이가 경기를 일으키며 몸을 뒤틀었다. 연한 살에 칼날이 스쳤는지 붉은 실 같은 상처가 생겼다. 그러자 남자가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벌벌 떠는 손을 내밀었다. “드,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만은 제발 건드리지 마세요!” 휘청거리며 일어선 그가 어딘가에 감춰두었던 계약서를 내밀었다. 몇 달째 월세를 내지 않아 보증금은 반밖에 남지 않았지만, 이거라면 동생에게 줄 돈은 되었다. 난 계약서를 집어들고 눈을 뒤집으며 기절한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아이 엄마가 제일 먼저 다가와 아이를 부둥켜안으며 울기 시작했다. 신발을 벗지 않고 들어와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려던 난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당신...” 이제 여자의 울음소리만이 작은 단칸방을 가득 메웠지만, 남자가 내는 낮은 목소리가 내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어쩌면 분노로 가득 찬 그의 눈을 봤기 때문이었을지도. “... 천벌을 받을 거야.” “천벌? 흥, 그런 게 있으면 나쁜 놈들은 벌써 다 죽었어, 병신아.” 코웃음을 치며 문을 닫고 나오는 등 뒤로 여자의 울음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몇 군데 더 일을 마치고 느릿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제일 가고 싶은 시간. 그러나 그때의 난 쉽게 구한 돈을 동생에게 넘겨주고 어서 집으로 가 명신이와 한바탕 뒹굴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아침부터 찜찜함이 남아있는 기분을 풀 건 녀석의 기분 좋은 몸뿐이었다. 그 생각만 가득 찬 채 오전에 만났던 자리에서 똑같이 서 있는 동생을 보았다. 날 알아차린 동생이 그 타인을 보는듯한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보자 입을 열었다. “형, 왜 이제 와?” 그 자리에서 꽤 오래 기다렸는지 대뜸 들리는 말에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려던 난 눈살을 찌푸렸다. 저 건방진 놈, 표정이 왜 저따위야? 게다가 왜 이제 오냐니? 돈 주는 것도 짜증나는구만. 평소의 성격 같아선 확 한 대 쳤겠지만, 빨리 줘버리고 집에 가자는 생각에 주머니에서 돈이 든 봉투를 꺼내며 다가갔다. “일단 200만 원이야. 내일 좀 더 구해서...” 줄 수 있으면 주겠다, 말을 하려는데 동생의 표정이 이상했다. 아니, 시선이 날 보지 않고 놀란 눈으로 내 뒤를 응시하고 있었다. 뭐지? 하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무언가가 빠르게 날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이 뛰어가던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린 건, 앞쪽에서 들리는 신음을 듣고 난 후. “윽...!” 다시 몸을 틀었을 때 시야에 들어온 건, 놀라서 눈을 크게 뜬 채로 입을 벌리고 굳은 동생. 그의 앞에는 누군가 동생을 감싸듯 안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동생의 배를 칼로 찌른 상태로. 느리게 그의 얼굴이 돌아갔고, 나와 눈을 마주친 아기 아빠가 독한 눈으로 속삭였다. “이게 바로 천벌이다.” 그 이후의 일은 자세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생각나는 건 붉은 피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새벽이 되었고, 동생은 죽었다는 것뿐.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불행은 한꺼번에 찾아온다고 했던가? 다음날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 방안에 보인 건 난장판이 되어 뒤집힌 살림살이였다. 나중에 사무실에 가져다줘야 할 수금한 돈 천만 원이 없어지고, 뒤늦게 온 집주인이 보증금까지 뺐으니 어서 정리하고 집을 비우라는 소리에 겨우 내가 명신이에게 배신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서 불행이 끝나면 좋으련만, 나에겐 아직 한 사람이 남아있었다. 동생이 병원비를 빌려야 했던 원인인 사람. 엄마. 동생이 죽고 이틀이 지나서야 찾아갔지만 날 기다린 건 이미 수술 시기를 놓쳐 뇌사판정이 난 엄마뿐이었다. 당시에는 갑작스레 들이닥친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째서 이렇게 돼버린 거지? 왜 한꺼번에 이렇게 무너진 거지? 그런 내게 의사의 질문이 들려왔다. 그 음성이 너무도 또렷해서 며칠간 내가 들은 유일한 말 같을정도였다. “호흡기에 의지한 채라 살아계시지만, 저대로는 오래 못 가실 겁니다. 보호자께서 마음의 준비가 되셨다면 이대로 어머니를 보내드리는 것을...” “나보고 엄마를 죽일지 결정하라고?” 이미 동생도 죽였는데 엄마마저 죽이라고? 아무리 막장 인생을 살아왔던 나라도 동생이 죽고 엄마가 저렇게 눈앞에서 죽어가는 상황에는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그저 몸만 살아있는 거라는 의사의 말에도 엄마를 비싼 기기에 매어두길 고집하고 그곳에서 나왔다. 내가 간 곳은 일했던 대부업체. 그리고 그곳에서 엄마를 계속 살게 할 돈을 빌렸다. “어떻게 갚을 건데?” 사장의 물음엔 웃음이 담겨있었다. “개처럼 일해서 갚겠습니다.” 그가 참지 못하고 이를 드러냈다. “다들 그렇게 말하고 빌려가지. 하지만, 제대로 갚는 놈은 하나도 없어. 너도 그럴걸? 알겠지만, 넌 이제 내 밑에서 일 못해. 너 같은 놈한테 내 돈을 맡길 수는 없지.” “다른 일을 해서 꼭 갚겠습니다.” “그래, 그렇게들 말한다니까.” 사장은 재미있는지 금고에서 현찰 다발을 꺼내주었다. “못 갚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알지?” “예.” “이거 진짜 골 때리네. 네 녀석이 무릎 꿇고 울면서 살려달라고 할 날이 과연 언제일까 기대되는 걸?” 낄낄거리는 사장을 뒤로하고 돈을 들고 병원으로 가 치료비를 냈다. 그리고 오랜만에 진짜 집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지하의 햇빛 안 뜨는 퀴퀴한 곳. 며칠간 사람이 들어오지 않은 방안은 가라앉은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들어섬으로 그것들이 깨어져 부서질 듯 무겁게 느껴지는. 나올 때 급했는지 이불은 반쯤 개다 말았고, 옷걸이 아래는 옷이 몇 개 떨어져 있었다. 사람이 사는 흔적이 있지만 내게 그것들은 박제처럼 보였다. 완벽한 그림 한가운데 내가 끼어 불청객이 된 기분. 그러다 눈이 불이 깜박이는 모니터로 향했다. 다가가 마우스를 움직이자 꺼지지 않은 컴퓨터의 모니터가 환하게 빛을 뿜어냈다. 순간 난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 자식, 컴퓨터도 끄지 않고 나가...” 불평은 다 나오지 못했다. 아, 그래. 동생은 죽었지. 몸을 일으켜 느리게 방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곳곳에 남은 동생과 엄마의 흔적. 책상 위에는 중학교 교과서와 참고서가 꽂혀있고, 그 앞엔 반쯤 잘린 지우개가 뒹굴었다. 벽에 붙은 시간표는 동생의 손 글씨였다. 사내아이답지 않게 여러 가지 색깔의 색연필로 예쁘게 그려진 시간표.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은 공부를 꽤 한다고 했었던 게 기억났다. 책상에서 조금만 눈을 돌리자 작은 샘플 화장품이 가득한 작은 플라스틱 바구니가 보였다. 평생 엄마의 화장품은 저 작은 병이 전부였었다. 그나마 어딜 갈 때만 아껴서 쓰던. 어릴 때부터 봐왔던 플라스틱 바구니는 반 정도가 깨지고 낡아 제 색을 찾기 어려웠다. 방 한가운데 선 채 오랫동안 시선을 그곳에 멈추었다. 이곳의 모든 건 평범한 일상에서 멈춰져 있었다. 주인을 기다리며 아무렇지 않게 평소의 모습을 간직한. 그곳, 죽은 동생과 이제 곧 죽을 엄마의 터전에서야 난 겨우 실감이 났다. 살아남은 건 빌어먹을 나 혼자라는 것을. 내가 친구라고 믿었던 이들은 내게 닥친 상황에서 모두 등을 돌렸다. 그들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그럴 틈이 없었다는 게 옳을 것이다. 난 빚이 있었고, 그걸 갚으려면 사장에게 말한 대로 개처럼 일을 해야 했으니까. 그래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일을 시작했다. 새벽엔 신문배달을 했고, 아침부터 저녁까진 공장에서 포장 일을 했다. 밤이 되면 우스꽝스런 분장을 하고 유흥가 길거리에서 전단을 나눠줬다. 하루에 자는 시간은 3시간 남짓, 밥은 두 끼. 그렇게 일을 시작했다. 엄마는 그날 이후 3개월을 더 사셨다. 몇 주도 못 버틸 거라던 의사의 말과는 달리 3개월이나 산 엄마는 아마도 마지막까지 자식을 생각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내가 혼자되는 걸 막으려고. 엄마의 단칸방을 정리한 돈으로 마지막 병원비를 내고 정말로 빈털터리가 된 날도 역시 유흥가에서 전단을 나눠줬다. 한여름 밤 숨이 막히는 인형 탈을 쓰고 새로 개업한 노래방의 전단을 사람들에게 내밀었다. 죽은 어머니의 유해를 강에 뿌리고온 날이었지만, 내게 쉰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일을 시작한 삼 개월 전부터 내 머릿속 어딘가는 움직이지 않고 굳어버린 부분이 있었다. 그것이 감정을 둔하게 만든 건지 모르겠지만, 새벽 2시 일을 끝내고 유흥가 뒷골목에 앉았을 때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삼 개월간 그 비싼 병원비를 내며 엄마를 살게 한 건, 그걸 바랐기 때문 아닐까? 그런데 왜 난 슬프지 않지? 그러나 멍하니 떠올린 질문은 피곤함에 눌려 이내 사라졌다. 새벽에 다시 신문배달을 나가려면 빌려 쓰는 창고로 가 의자에 누워 잠을 자야 그나마 2-3시간이라도 쉬 수 있었다. 그런데 평소라면 재빨리 창고로 향했을 몸이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인형 탈을 쓴 채 앉아있는데 어디선가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흥가에서 싸우는 소리는 드문 게 아니다. 다만, 그 소리가 술 취한 게 아닌 멀쩡한 목소리들이라면 드물겠지만. 그래도 내 신경을 끌 건 되지 못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내뱉은 단어 하나가 날 움직이게 했다. “이 천벌 받을 새끼!” 험한 남자의 음성에 뒤이어 서로 몸을 부딪치며 싸우는 소리가 이어졌다. 툭, 탁, 탁, 챙! 사람과 물건이 부딪치고, 병이 깨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건 내게 아주 익숙한 소리. 걸음을 옮겨 모퉁이를 돌자 한 사람을 둘러싸고 네 명의 남자가 공격하고 있었다. 당연히 맞서는 한 명이 수세에 몰릴 처지였는데, 상황은 거의 막상막하였다. 저 한 명이 싸움을 잘하는구나, 싶었던 건 공격하는 자들의 수가 많아서는 아니다. 그들은 20대 초중반으로 근처 나이트에 놀러 나온 좀 센척하는 동네 양아치로밖에 안보였으니까. 저런 녀석들이라면 나라도 혼자 처리할 수 있었을 거다. 내가 놀란 건 맞서는 한 사람이 한쪽 팔로만 싸우고 있어서였다. 그는 한쪽 팔을 깁스한 상태. 그런데도 용케 네 명에 맞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여유까지 부리며 싸우고 있었다. 상황이 어찌 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깁스한 남자가 결국은 이길 것 같았다. 애초 날 자극하게 한 단어가 아니었다면 관심도 두지 않을 일이어서 그대로 몸을 돌리려고 했다. 그런데 공격하던 양아치 중 하나가 무언가를 꺼내 드는 게 보였다. 그건 내겐 익숙한 단도. 전에 내가 쓰던 것과 같은 종류의 칼이 한 명 손에 들렸다. 나도 모르게 자동으로 발이 옮겨갔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내 손이 움직이고 난 후였다. “크아악!” 탕. 칼을 떨어트린 양아치가 내게 잡혀 뒤틀린 팔 때문에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제압당해 팔을 꺾인 탓일까, 어느새 싸움이 멈추고 시선은 모두 날 향해 있었다. 그런데 양아치들의 시선은 모두 황당하다는 빛을 띠고 있었다. “넌 뭐야?” 놀란 양아치 하나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난 그를 힐끔 보곤 아직 비명을 지르는 녀석의 얼굴에 반대편 주먹을 날렸다.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가 바닥을 뒹굴자 다른 양아치 셋이 얼른 동료에게 달려가선 날 홱 노려봤다. “씨발, 너 저 자식하고 한패야?” 난 그가 지목하는 이를 보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양아치는 못 믿겠다는 얼굴로 더 크게 날뛰었다. “이 치사한 새끼들! 서로 짜고 뒤에서 덮쳐?! 이런 비겁한...” 넷이서 한 명한테 덤비고선 뭐가 비겁하다는 건지, 한심한 양아치들은 그렇게 소리를 지르다 바닥에 쓰러진 동료를 들쳐업고 도망가 버렸다. 넷이서 한 명한테도 이기지 못했으니 나까지 상대하기는 무서웠을 것이다. 그들이 도망가는 걸 보며 난 몸을 틀었다. 이젠 자러 가야지. 머릿속에 목표를 정하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남은 한 사람이 날 불렀다. “야, 토끼.” 토끼? 의아함에 몸을 틀다가 그제야 내가 아직 인형 탈을 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양아치들이 날 봤을 때 황당해하던 눈빛은 이것 때문이었구나. 도망간 녀석들을 떠올리는데 느릿한 음성이 들렸다. “어떻게 책임질 거야?” 언제 꺼냈는지 담배를 입에 문 그가 왠지 나른해 보이는 눈으로 이유를 덧붙였다. “네 덕분에 가지고 놀려던 녀석들이 도망갔잖아.” “...” “묻잖아, 지화자 노래방.” 내가 가슴에 선전으로 단 노래방 이름을 그가 억양 없는 목소리로 읽었다. 다른 이가 했다면 웃음이라도 튀어나올 단어인데 그의 입을 통해선 살벌한 단어처럼 들렸다. 난 그제야 그 사람을 제대로 돌아봤다. “그래서 어쩌라고.” “니가 놀아줘야지.” 나이가 얼마나 됐을까? 20대 중반은 넘긴 것 같지만, 그의 눈이 나이를 가늠하지 못하게 했다. 대부회사에서 일할 때 업계에서 독하기로 소문난 나이 많은 사장들의 눈이 저랬었다. 무슨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는 인간 같지 않은 눈. 저렇게 느긋한 말투였지만, 오히려 긴장을 하게 된 건 이 때문이었다. 나도 독한 놈이지만 더 독한 세계에서 일하며 깨달았다. 저런 눈을 가진 사람과는 상종을 해선 안 된다는 걸. 난 눈을 내려 깁스를 한 그의 팔을 봤다. 큰 키의 그는 과거 내가 이기려고 덤벼들던 녀석들과 비슷한 체형이었다. 1년 전에만 만났어도 아무것도 몰라 죽어라 덤볐을지도. 아니, 어쩌면 상대가 한쪽 팔을 못 쓰니 지금이야말로 싸워볼 만하겠지. 싸우는 건 어렵지 않다. 몸에 익은 기술이라곤 그것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싫었다. 가슴이 답답한 오늘은 싸움을 해봤자 그 답답함이 더 커질 것 같았다. 내가 답을 하지 않는 게 싫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건지, 그가 1/3쯤 탄 담배를 바닥에 던지며 입가를 비틀었다. “싫다면 억지로 놀게 해줄 수밖에.” 그리고 한 발짝 다가오는 그를 보며 나도 이해 못 할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당신 남자도 돼?” 멈칫. 걸음을 멈춘 그가 뜻을 알아차리고 처음으로 눈에 웃음을 드러냈다. 그의 나른한 목소리를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내가 박는 쪽이라면.” 가면은 쓰고 아래만 벗은 채 남자 위로 올라탔다. 츄파?스처럼 머리만 큰 우스꽝스런 모습이었는데도 나나 깁스를 한 남자나 웃는 사람은 없었다. 난 처음 뒤로 성기를 받아내느라 입구가 찢어지고 내려앉는 다리가 덜덜 떨리는 통에 웃지 못했지만, 남자는 오히려 그런 내게 ‘천천히 해’라며 진지한 조언까지 던졌다. 이상한 성교였다. 전희도 없고 그저 옷을 벗은 다음 아무것도 없이 시작된 삽입. 고통밖에 없고, 난 발기하지 못한 채 그저 피를 흘리며 어서 끝나기만을 바랐다. 그러면서도 밑에서 쳐올리는 남자에게 그만 하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어째서인지 발기를 한 그는 아파서 잘 움직이지 못하는 날 처음부터 사정 봐주지 않고 마구 쳐올렸다. 내 뒤에서 피가 흐르건 말건 그는 자유로운 한 손으로 내 허리를 잡고 도망가지 못하게 막으며 꽤 오랜 시간 박아댔다. 피곤함과 멍한 정신에 고통이 겹쳐져 내게 그 시간은 너무도 길었지만, 마지막 몸 안으로 남자가 사정을 할 때 무언가를 알아차렸다. 숨을 헐떡거리느라 몰랐는데, 난울고 있었다. 가면 아래서 더운 숨을 내뱉으며 눈물과 콧물로 지저분해진 얼굴을 깨달았다. 동작을 멈춘 남자의 배 위로 손을 올려 상체를 지탱하면서 그렇게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아마도 온기가 필요했었나 보다. 하지만, 천벌을 받아야 할 나는 그 온기를 온전히 따뜻하게는 받을 수 없다. 20분가량의 성교가 주는 고통의 대가라면 괜찮았는지도. 그래서 울었을까? 아직 몸 안에 남자의 것을 품고 그렇게 울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날 무표정하게 보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너, 다 울었으면 가면 벗어봐.” 자연스럽게 나오는 명령투의 말엔 묘한 힘이 있었다. 그대로 벗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는데 난 용케 벗는 대신 그의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몸 안 깊숙이 박혔던 성기가 빠지는 느낌이 생생하게 뒤를 타고 흘렸다. 성기가 나가고 그가 뱉어낸 정액이 뒤를 이어 구멍에서 흘러내렸지만, 난 상관 않고 바지를 입었다. 내가 그대로 나가려는 걸 눈치 챈 그가 눈을 어둡게 빛내며 몸을 일으켰다. “야, 토끼. 귀여움받고 싶으면 얌전히 말 들어.” 나른한 협박을 들으며 난 바지만 걸친 채 그에게 다가갔다. 앉은 채 날 올려다보는 그의 앞에 서서 물었다. “세상에 천벌이라는 게 있을까?” “없어.” 바로 나온 답에 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천벌이란 건 없어.” 천벌받을 놈이라고 해도 그저 더 악한 일을 하며 잘 사는 게 현실이다. 그래, 난 벌을 받은 게 아니다. 내가 한 일에 대한 결과를 얻은 것뿐이지. 천벌은 나에게 어쩌면 사치스러운 이유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없는 천벌로 내 죄를 떠넘기려는. 운이 없어 나만 이런 꼴이 된 거야 따위의 망상은 내게 필요 없다. 그때 남자의 느린 음성이 들렸다. “하지만, 인과응보는 존재해.” “...” “그래서 세상은 참 재미있지.” 비틀린 그의 입가 끝에 작은 보조개가 생겼다. 그 순간 어울리지 않게 귀엽다는 감상을 떠올리며 손을 뻗었다. 그리고, “크흑!” 남자가 깁스를 한쪽 팔을 잡고 숨을 들이켜며 허리를 굽혔다. 깁스에 반쯤 나와 있던 손이 퉁퉁 붓고 검붉은 멍이 든 걸 보면 아마 다친 지 얼마 안 되었던 것 같다. 그 손을 뒤틀었으니 아마 깁스를 하는 시간이 더 길어지겠지. 그에겐 미안하지만, 계속 놀아줄 시간이 없었다. 난 바닥의 인형 옷을 팔에 걸치고,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이 토끼 옷을 입고 전단을 나눠준 일당으로 받은 2만 원. 그걸 그의 앞에 던져놓고 덧붙였다. “같이 놀아준 대가야.” 2만 원을 주고 샀던 남자와의 잠자리는 생각보다 후유증이 컸다. 거의 일주일간 고생을 한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날 토끼 옷에 나도 모를 피를 묻힌 덕분에(아마도 양아치의 피였나 보다) 다음날 바로 잘려 더는 토끼 옷을 입을 일은 없었다. 대신 도로공사 야간 아르바이트를 구했고, 다시 내 하루는 온종일 개처럼 돈을 버는 것으로 꽉 차게 되었다. 하루하루가 버티기 어려웠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길게 이를 악물고 무언가를 버틴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4년 6개월. 총 부채액 1억 5천 3백 27만 7천 360원을 내 나이 26살이 되는 해 모두 갚았다. 저 중 원금은 2,000만 원도 되지 않았다. 마지막 돈을 들고 사장을 찾아갔을 때 그는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너 같은 녀석만 있다면 이 일 해먹기도 쉬울 거라며 칭찬해줬다. 그리고 나서는 히죽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돈 쓸 일 있으면 또 찾아와.” 대꾸도 안 하고 나서는데 그가 뭔가 떠올린 듯 갑자기 날 불렀다. “참, 너 나 말고 다른 곳에서도 돈 빌렸어?” “아뇨.” “그래? 흠, 최근 누가 널 찾는다는 것 같던데? 너 처음 빚 갚기 시작할 때 내가 소개해줬던 직업소개소에서 연락이 왔더라고. 아니면 그때 일하며 무슨 사고라도 쳤냐?” 처음 빚 갚기 시작했을 때라면 벌써 5년 전이다. 그때 사고 칠 일이 뭐 있겠는가? 사장이 소개해줬던 곳에서 준 일이라곤 인형 탈을 쓰고 전단 나눠준 것밖에 없는데. “없습니다.” 무뚝뚝하게 내뱉자 그가 ‘흠’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또 급하게 찾기에 일단 너 모른다고는 해뒀다.” 고맙다는 말을 바라는 건지, 그가 빤히 쳐다봤지만 난 볼일을 다 본 이상 그대로 몸을 틀었다. 그런데 그가 다시 날 불렀다. 어딘지 진지한 목소리로. “야, 다시 내 밑으로 들어오지 않을래?” “싫습니다.” “... 너 진짜로 변했구나.” 뒤이어 ‘개과천선이라도 한 거냐?’ 묻는 말이 들렸지만, 시간이 없어 그냥 나와 버렸다. 택배는 시간이 생명. 지금 하는 택배의 오늘치 배송을 끝내려면 지금부터 뛰어도 모자랐다. 운이 따랐던 하루인 것 같았다. 빚을 다 갚은 날이라서 그냥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지만, 평소보다 빨리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집에 아무도 없어 전화를 걸면 거는 족족 모두 받아서 물건 맡길 위치를 알려줬고, 무거운 짐은 3층 이상 걸어 올라가는 집이 없었다. 정말로 운이 따른다는 느낌. 그런데 운은 그냥 거기까지였나 보다. 일을 다 마치고 차에 타자마자 소장님한테 전화가 왔다. “야, xx쪽에 사고 터졌다. 차가 서버렸다니까, 어서 그쪽 지원 좀 나가봐!” 소장님이 직접 움직이는지 시끄러운 잡음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xx쪽이라면 사무실이 밀집된 한가운데. 사무실 쪽은 퇴근 전까지 배달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촉박하다. 시계를 보니 5시 30분. 트럭이 비행기로 변해 날아간다고 해도 늦겠다, 생각하며 운전대를 돌렸다. 온몸이 땀에 젖어 마지막으로 뛰어간 곳은 비싼 땅값으로 유명한 곳 중에서도 노른자위에 서있는 어느 7층짜리 건물. 내 구역이 아니라 처음 와보는 곳이지만, 건물 전체가 하나의 회사로 보이는 곳에 유난히 택배가 많았다. 차가 고장 난 담당이 말하길 여긴 늦게까지 사람들이 남아있으니 천천히 가도 된다고 했는데 정말인 것 같았다. 7시가 넘어가는 시간인데도 건물 앞엔 사람들도 많았고, 출입하는 사람들도 꽤 됐다. 뭐 하는 데지? 의문이 들었던 건, 건물 앞에 선 사람들이 모두 여자에 중고등학생으로 보인다는 점이었다. 트럭에서 꺼낸 택배물을 짐수레에 옮기고 건물 입구에서 벨을 눌렀다. 닫힌 유리문 안쪽에 경비원이 날 보곤 바로 정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밖에 서있던 여학생들이 열린 문 안쪽을 보려고 고개를 내미는 게 보였다. 그러다 안에서 누굴 본 건지 꺅꺅~ 거리는 소리가 여학생들 사이에서 퍼졌다. 그러나 이건 일상적인 모습인지 안에 경비원이나 넓은 로비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중 누구도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카트를 밀고 경비원에게 출입 패스를 받고 나서야 이곳이 뭐 하는 회산지 알게 되었다. “좋아하는 연예인 얼굴 한번 보자고 저러는 걸 쟤들 부모님은 아나 몰라.” 투덜거리는 그의 말을 들으며 뒤쪽 벽에 붙은 층별 안내도에 시선을 돌렸다. 제일 먼저 보인 건 회사 이름. [DREAM ENTERTAINMENT] 기억 속에서 과거 애인이었던 명신이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가 언제가 가고 싶어하던 최고의 연예 기획사. 아, 그런가. 여기가 바로 거기였군. 회사 이름 하나에 떠올릴 일 없던 과거가 생각나자 왠지 기막힌 웃음이 속에서 솟았다. 그동안은 잊고 있었다. 전 애인이 날 배신했다는 것조차. 느리게 짐수레를 밀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느리게 바뀌는 숫자를 쳐다봤다. 나와 같이 탔던 여자 둘이 흥분해서 떠드는 소리가 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 나 심장 떨려 죽는 줄 알았어. 글쎄, 마케팅부에서 실수한 걸 윤 이사님이 알아낸 거야.” “어머, 그걸 어떻게 알았데?” “몰라. 아무튼, 알잖아 너도. 윤 이사님 미소 지으면서 사람 등골 오싹하게 하는 거.” “알지. 난 2달 전에 윤 이사님 처음 외국에서 돌아왔을 때 다들 그 미소 때문에 편한 사람인 줄 알았다가 잘린 사람이 한둘이니?” 정말로 무서운지 여자가 어깨를 움츠렸다. “나이도 젊고 계속 4년간 외국 지사에 있다가 들어온 거라, 좀 자유분방한 사람일 줄 알았는데 이건...” 땡~ 소리가 나고 드디어 내가 내릴 곳이 되자 여자들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빨리 이걸 전달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가득 차 열리는 문으로 얼른 짐수레를 밀며 내렸다. 그런데 쓰고 있던 모자 때문에 내가 내리는 것과 동시에 올라타는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보질 못했다. 고개를 돌렸던 건 목소리 때문이다. 5년이 지나도 귀에 익은. “좀 빨리 와! 왜 이렇게 굼벵이처럼 굼떠! 나 지금 촬영 늦었단 말이야!” 짜증을 내는 목소리에 몸을 틀자, 엘리베이터에 탄 남자가 팔짱을 낀 채 급하게 복도를 달려오는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잘 손질된 머리, 좋아 보이는 옷, 적당히 근육이 잡힌 몸. 5년 전 내 돈을 가지고 날랐던 명신이었다. "헉, 헉... 이, 이거 맞아?” 헐레벌떡 뛰어온 40대 중반의 남자가 손에 든 음료수 병을 들어 올렸다. 자판기에서 바로 꺼낸 건지 표면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러나 남자가 급하게 뛰어 가져온 음료수는 소용이 없어 보였다. “아냐.” 짧게 나온 차가운 말에 뒤이어 욕설이 덧붙여졌다. “병신새끼,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몰라?” 남자의 얼굴에 당황함이 드러났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마치 일상인 양 누구도 명신이가 나이 든 남자에게 함부로 대하는 걸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멈춰 서서 그걸 보는 나만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정도였다. “5분 주겠어. 그 안에 내가 마시는 걸로 가져오지 않으면 간신히 들어온 이곳에서도 잘리게 해줄 테니까. 알았어?” 짜증이 묻어난 협박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닫히기 전 그의 눈길이 잠시 내 쪽을 향했다. 짧지만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그는 이내 옆에 있던 사람에게로 눈을 돌려버렸다. 닫힌 문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으나 난 잠시 시선을 그곳에 두었다. 별 감흥은 없었다. 그가 날 알아차리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나 서운함은 더더욱 없었고. 그건 감정이 남아있지 않아서일 거다. 그가 날 배신했다는 건 그저 과거의 한 조각일 뿐이었으니까. 현재의 나에겐. “애들 학원비, 애들 학원비...”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음료수 병을 든 남자가 화를 삭이듯 입안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곤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나도 몸을 틀어 내 일을 위해 움직였다. 택배물을 전해주고 다시 엘리베이터에 타기까지 난 다시 보게 된 과거의 편린을 생각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나와 같이 엘리베이터에 탄 자가 명신이를 떠올리게 했다. 그는 가슴 가득 온갖 음료수를 안은 남자였다. 아마도 명신이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 자판기에서 모두 뽑은거겠지. 그 모습에 이상하게 속에서 쓴웃음이 나왔다. 예전 명신이는 말이 거의 없었지만, 술이 들어가면 자신의 이야기를 종종 했었다. 대부분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던 이야기였는데, 그중 특히 매일 같이 음료수 심부름을 하는 게 제일 싫었다고 털어놨었다. 자판기가 교실과 멀어 짧은 쉬는 시간 동안 다녀오는 게 힘들었다고. 그러나 그렇게 뽑아서 온 음료수는 소용이 없었다. 원하던 게 아니라는 이유로 다시 몇 번이고 자판기까지 뛰어야 했고, 결국 자판기의 모든 음료수를 뽑았다고 했었다. 집에서 받는 용돈은 매번 그 음료수 값을 대는 걸로 나갔다고. 그 괴롭힘에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나중에 가출했지만, 그는 괴롭힘 당한 기억에서 자유로워 보이진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힘을 갖게 된 그가 그때 자신을 괴롭혔던 가해자와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탕. 남자의 가슴에서 음료수 병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난 허리를 굽혀 내 앞으로 구른 병을 집어 남자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남자는 차가운 음료수를 가득 껴안고 있어 내가 내민 병을 받을 여유가 없었다. “미안하지만, 그냥 이 위에 얹어주겠어요?” 그가 몸을 살짝 숙이며 부탁하는 순간, 다시 탕~ 다른 음료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이쿠’ 남자의 입에서 당황한 소리가 튀어나왔고, 난 그를 대신해 두 번째로 떨어진 음료수를 집었다. “제가 들고 있겠습니다.” “고마워요.” 인사를 한 그는 내가 좀 전 상황을 목격한 택배원이라는 걸 알았는지 허탈하게 웃었다. “이것 참, 내 꼴이 우습죠? 먹고 살려다 보니 나도 어쩔 수가 없어서. 기획사 말아먹은 날 겨우 받아준 데가 이곳뿐이라 일하며 목에 풀칠할 수 있는 것도 내겐 감지덕지라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쓸데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갑자기 목소리 톤을 낮췄다. “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좀 전에 본 송유한의 모습을 인터넷 같은데 목격담이라고 올리고 그러면 안 됩니다.” “송유한이 누군데요?” 그러자 엥? 하며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송유한 몰라요? 나한테 이거 사오라고 시킨 빌어먹... 흠흠, 그 연예인.” 연예인. 그래, 정말로 그렇게 원하던 연예인이 됐군. 이름도 바꾸고, 얼굴도 변하고, 유약하던 이미지도 버리고. 신경 써서 보지 않는다면 못 알아볼 만큼. “주연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요새 꽤 나가는 배운데. 광고도 여러 개 하고. 유명한 주말 버라이어티에 한 2개월 전속으로 나와서...” “...” “...” “...” “저기, 미안한데.” 그가 갑자기 말을 끊고 날 뚫어지게 보기 시작했다. 그 시선에 불쾌함이 들때쯤, 그가 돌연 이상한 요구를 해왔다. “모자 좀 벗어보겠어?” “싫습니다.” 단번에 거부하자 그의 눈에 약간의 당황함이 떠올랐다. “아니, 이상한 건 아니고 눈빛이 굉장히 좋아서 말이야. 그냥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보고싶...” 땡~ 도착했다는 엘리베이터의 소리가 들리자 난 그제야 내가 내려야 할 1층을 누르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드르륵~ 열리는 문을 보며 뭔가 말하려는 남자의 팔 위에 음료수 병 두 개를 얹어줬다. “나이가 몇 살이야? 혹시 학생인가? 나 정말로 이상한 사람 아니고...” “5분.” 난 열린 엘리베이터 문밖의 지하 주차장을 가리켰다. “지난 것 같은데요.” 송유한으로 이름을 바꾼 명신이를 떠올리게 해주자 아니나 다를까 그가 화들짝 놀라며 얼른 엘리베이터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며 내게 큰소리로 부탁하는 걸 잊지 않았다. “거기서 잠깐만 기다려요! 어디 가지 말고, 잠깐만!” 그는 다시 음료수 병을 떨어트릴 듯 위태위태한 뜀박질로 주차장 안으로 사라졌다. 사실 그대로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누르고 올라가려고 했었다. 남자가 왜 날 보고 기다리라고 했는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몇 년 만에 본 명신이가 연예인이 되어 날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도 그리 놀랍지도 않았으니까. 오히려 물류센터로 얼른 가 밤 근무인 분류작업을 끝마치자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와 좀 떨어진 비상계단의 문이 열렸고, 그곳에서 나온 누군가 때문에 그러질 못했다. 두 번째로 보게 된 명신이는 30대 초반의 양복을 입은 남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주차장 안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그건 음료수 아저씨가 뛰어간 곳과 반대 방향이었다. 재미있는 건, 그가 걸음을 옮기기 전 힐끔, 음료수 아저씨가 사라진 방향을 눈으로 확인했다는 거다. 자동차와 기둥 사이에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그의 위치에선 열심히 뛰던 그의 모습이 보였을 터인데 그대로 몸을 틀었다. 피식, 웃음을 지으며. 그 웃음이 나도 모르게 발을 움직이게 했다. 약간의 호기심이었다.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한 그를 확인하고 싶다는 정말로 작은 호기심. 그동안 사람이나 사물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둔 적이 없어, 오랜만에 만난 그에게 인 작은 호기심에 몸이 움직였나 보다. 아니, 사실은 무시하고 그냥 올라갈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난 여전히 택배 일을 하는 일상으로 돌아가 계속 그렇게 살았겠지. 호기심을 따른 작은 결과가 바꿀 내 인생을 모른 채. 끽. 카트의 바퀴에서 삐걱 소리가 유난히 크게 지하를 울렸다. 난 그것을 엘리베이터 옆에 둔 채 조용히 명신이가 사라진 쪽으로 향했다. 그는 양복 입은 남자와 함께 거대한 지하주차장의 끝쪽 기둥 뒤로 모습을 감췄다. 툭 튀어나온 엘리베이터 벽을 두고 음료수 아저씨가 사라진 방향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그곳으로 느리게 걸어갔다. 그저 호기심이지 딱히 무언가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조금 전 얼핏 본 그의 웃음이 좀 놀라워 다시 확인하려 한 것뿐이지. 저 녀석 정말로 명신이가 맞을까 하는. 물론 알고 있다. 내가 아는 과거의 그는 그저 내 착각이고, 원래 그의 본모습을 전혀 몰랐던 걸지도 모른다는. 어쨌든 난 5년 전 배신을 당했으니까. “그래, 좀 알아봤어?” 간신히 알아들을 듯 목소리가 들리자, 난 걸음을 멈추고 높은 벤 뒤로 몸을 숨겼다. 명신이의 목소리에 이어 양복 입은 사람의 음성이 이어졌다. 난감함이 느껴지는. “나도 자세한 건 몰라. 그냥 윤 이사님 비서인 박 실장님한테 조금 물어본 게 전부니까. 그나마도 윤 이사님 일이라고 전혀 말을 안 해주더라고.” “하지만, 윤 이사님 분명히 한국에 오자마자 사람을 찾는 건 맞잖아?” “응, 그렇긴 한데...” “그래서 누굴 찾는 건데? 나 내년에 시작할 그 드라마 주연 따내려면 윤 이사님하고 어떻게든 엮어야 해. 내가 잘되면 단단히 한몫 잡게 해줄게. 알잖아, 내가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라는 거.” 답이 없는 걸로 봐서 양복 남자가 알았다는 표시를 한 것 같았다. “한 5년 전쯤 만났던 사람인가 봐. 박 실장님이 적어놓은 메모를 슬쩍 봤는데 이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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